엘리자베스 1세
최근 편집일시 :
분류
1. 개요[편집]
16세기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
헨리 8세의 적차녀이며 어머니는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이다.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이자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으로, 1557년 메리 1세가 자식을 남기지 않고 사망함에 따라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자식 중 마지막 생존자로서 왕위를 물려 받았다. 그녀 또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국왕으로 남게 되었고, 그녀의 사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하며 스튜어트 왕조를 개창했다.
평생 미혼이었기 때문에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그녀의 치세를 의미하는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 era)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이 이끈 영국 희곡의 번영기이자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선봉으로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하는 위용을 떨치던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그밖에 동인도회사 설립 등 여러 치적을 남겨 훗날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 받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영국 사학계가 이러한 평가에 많은 수정을 가해온 결과 지금은 과거만큼 미화되고 있진 않지만, 근대 초기 잉글랜드의 강국화를 상징하며 남긴 업적도 큰 인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기에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즉위 전[편집]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2.1. 성장 배경[편집]
어릴 적엔 첫자식이자 무사히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라 총애받았던 언니 메리 1세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로 태어나 사랑받았던 남동생 에드워드 6세처럼 엘리자베스도 한동안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믿었던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단 사실[1] 에 헨리 8세는 크게 실망하고, 점점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녀 자신은 아버지에 대해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없었지만 군주로서의 롤 모델로는 존경했던 듯하다고.
거기다 생모 앤 불린은 말하자면 불륜, 신분도 (공주 출신인 캐서린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상간녀'이미지로서 백성들의 지지도 별로 받지 못했다.[2] 결국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앤 불린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슬픔을 겪게 되고, 과거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복언니 메리 1세가 공주작위와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사생아로 전락했던 것처럼 자신도 작위와 계승권을 잃고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3]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총명하며 공부를 좋아했고, 교양인이었던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이자 의붓 어머니인 캐서린 파 아래에서 열심히 교양을 습득했다. 당시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아들도 남자 못지 않게 교육시키는 풍토가 있어 엘리자베스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사사해 각종 학문을 배웠다.
1547년에 부왕인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의붓어머니인 캐서린 파와 잠시 함께 살았다. 파는 헨리 8세와 사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했기에 엘리자베스는 시모어와도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야심만만한 시모어가 왕위계승권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추근대는 일이 생겼다. 이를 곧 눈치 챈 파는 그 즉시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자칫하면 왕위계승권자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당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추문이었으나 그때 엘리자베스는 고작 14세의 소녀에 불과했으며,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진심으로 걱정해 조언해 주었기에 엘리자베스가 시모어와 절연함으로써 이 추문은 한때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4]
4살 차이가 나는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복언니 메리 1세와도 어린 시절에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앤 불린의 딸임에도 동생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점차 정치적 입장과 종교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벌어졌다.[5] 메리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모반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당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한데다 다행히 증거가 없어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메리 1세는 엘리자베스와 애증어린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죽음을 눈 앞에 두자 할 수 없이 헨리 8세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6]
2.2. 잉글랜드의 입장[편집]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잉글랜드는 여러 모로 불안한 상태였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세운 수장령에 의해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국교회[7] 로 독립했으나, 언니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 교회로 복귀하여 가톨릭 국가로 되돌아선 바 있었다.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는 가톨릭교회의 맏딸로 불릴 만큼 골수 가톨릭인 에스파냐의 왕이었고, 프랑스 또한 종교적으로 분열되긴 했으나 왕가가 있는 파리 중심은 골수 가톨릭 신앙으로 역시 개신교인 위그노들을 탄압했기에 종교적으로 긴장관계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공통의 적을 가진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왔는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프랑스왕의 장자 도팽[8] 인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하여 동군연합이 될 예정이라 잉글랜드를 적대 하고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외가가 프랑스 왕가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골수 가톨릭 기즈 가문[9] 으로 이들 역시 가톨릭 신자였기때문에 가톨릭계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무효로, 앤 불린은 그의 첩이며 그사이에서 낳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주장해서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고, 메리 스튜어트야말로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열강의 틈새에서 정치적 격변에 시달리는 잉글랜드의 지위는 여러 모로 불안정했다. 더군다나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아직도 종교적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메리 여왕이 교황청에 잉글랜드 교회를 조공으로 바친 상황에서 다시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대륙의 개혁 신앙이 뿌리내리길 바랐고 가톨릭 교도들은 종교적으로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엘리자베스를 가톨릭 가문과 결혼시켜 잉글랜드의 가톨릭의 입장을 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런 탓에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으로 여러 명문가의 사람을 고려하고 있었고, 또한 엘리자베스에겐 많은 구혼이 들어왔다.
2.3. 혼담을 거절하다[편집]
맨 처음에 들어온 건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었는데, 이건 그가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것과 잉글랜드에서의 그의 평판이 나쁘다는 2가지 이유로 인해 바로 깨졌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온 혼담의 경우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 때문에 바로 깨지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들어온 대표적인 혼담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아들 카를 대공[10] ,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1] ,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신교도 귀족 로버트 더들리 경, 신교도 국가인 스웨덴의 국왕 에리크 14세 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혼담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이유로 질질 끌다가 흐지부지되었다.
혼담 가운데에선 같은 시대를 살던 루스 차르국의 뇌제 이반 4세도 있었다. 물론 그의 악명을 잘 알던 그녀는 루스 차르국 사신에게 한마디로 거부했다. 사신은 돌아가면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이반 4세는 기분 나쁜 얼굴을 했어도 사신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인지 여왕의 시녀였던 레이디 메리 헤이스팅스에게 청혼을 했다. 잉글랜드와의 교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레이디 메리는 '미개한 야만인의 나라[12] 먼 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떨었다. 여왕도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레이디 메리에게는 '러시아의 차리나'[13] 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3. 여왕 즉위 후[편집]
26세 때인 1559년 즉위 이듬해의 초상화.
3.1. 결혼을 거부하다[편집]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1세[14]
실제로 그녀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붙여준 별명은 버진 퀸.[15]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야사나 설이 존재한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강력한 질 협착증이 찾아와 남성의 성기를 박살내버린다든가, 생식기가 기형이라거나 하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가톨릭 국가들의 악의에 찬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생식이 불가능하다=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소문이 있어 에스파냐 대사가 특별히 조사를 해 보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녀의 생식 능력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사실은 결혼하지 않았을 뿐 이미 수십 명의 남자를 침대로 끌여들였다는 등의 악질적인 소문도 존재했다. 대부분은 정적들이 퍼트린 험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증명됐지만, 이후로도 소문은 종종 살아남아서 몇몇 인물이 여왕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남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와 같은 시대 인물인 셰익스피어마저 그녀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할 지경이었다.
본인이 예전에, 메리 1세가 추진하던 자신의 정략결혼에 반대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위와 같은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16] 일단 헨리 8세가 국교를 성공회로 갈아치운 후에도 왕족들이 정통 기독교 국가의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는 문제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 제의가 들어와도 임하는 척하면서 성사시키지 않는 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결혼한 여왕"이란 예찬 분위기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사가들 사이에선 크게 부군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17] 와 성장하면서 안 좋은 결혼 관계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18] 결혼을 싫어하게 된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실상 그녀의 결혼은 문제가 많았다. 신교 국가인 북유럽을 포함해서 그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을 지닌 외국의 왕족은 대부분 가톨릭 교도였기에, 이들 중에서 남편을 택할 경우 잉글랜드 국교회가 흔들릴 것이며 외세의 간섭 또한 심해질 것이었다. 실제로 메리 1세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인기를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이 때문이었다.[19] 자국의 신하와 결혼하는 것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이 명백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명백한 예였다.[20] 그러나 당시의 관념상 여성이, 그것도 한 나라의 여왕이 결혼하지 않고 후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두고 두고 문젯거리가 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미혼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가장 큰 자산이었기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21] 혼담 진행 과정을 보면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대부분 반가워하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 진전이 이뤄지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22] 파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각 근거가 있는 주장이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말한 적이 없으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나중에는 성녀처럼 공경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조차 두지 않은 탓에 국내에서는 계속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기라도 할 경우 왕위를 둘러싼 혼란은 불 보듯 뻔하거니와 최악의 경우 가톨릭 국가가 지지하는 가톨릭교도가 왕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신하들에겐 골칫거리였고 신하들은 그녀에게 제발 결혼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여왕은 언제나 결혼할 듯 하면서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이 40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신하들도 여왕의 혼담에 대해서 찬성보다 반대 입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노산으로 인한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출산하다 사망하는 여인이 드물지 않은데, 노산이 예상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하들은 결국 여왕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단 한번 약혼까지 한 적이 있는데 상대는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막내아들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 왕자였다. 이 때는 여왕의 나이가 이미 46세로 후사를 볼 가능성이 없어 후계가 꼬일 가능성이 없기도 했고, 당시 22세였던 프랑수아가 청혼을 위해 직접 잉글랜드에 찾아오자 아들뻘인 이 젊은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여왕은 신하에게 "앙주 공작이 못생겼다고 들었는데[23] 직접 보니 괜찮다"고 말했고 이내 '나의 개구리'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면서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와의 결혼도 불발되었는데, 네덜란드의 국가원수로 초빙되어 갔던 프랑수아가 안트베르펜에서 반대 세력에게 대패하고 쫓겨나자 자신의 평판에 흠이 갈 것을 염려했던 엘리자베스 여왕 측이 파혼한 것이다. 자신이 다스릴 예정이었던 나라와 결혼하게 될 여왕까지 모두 잃은 프랑수아는 1년 뒤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3.2. 후계자 문제[편집]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후계에 대한 말에 몹시 민감해서, 누군가 그에 대한 진언을 올리기라도 하면 몹시 격노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후계에 대해서 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후계를 정하는 순간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여성이었고 당시의 가치관으로써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적인 존재로, 왕위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걱정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후계자로 지목한 자가 남성이라면 그를 옹립하기 위해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서 퇴위하라는 압박을 받을 것이었다. 여성이어도 그녀보다 젊은 이상 언제 그녀의 자리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왕위 계승권을 지닌 왕가의 여성들(특히 아들이 있는 경우)은 언제나 엘리자베스의 경계를 받았다. 실제로 그녀가 즉위하기 전 제인 그레이의 예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도 알고 신하들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후계감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밖에 없다는 건 명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라 이미 튜더 왕조가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 헨리 8세의 후손들은 남지 않았다. 결국 헨리 7세의 여계 후손 중에서 후계감을 골라야 했고, 가장 최우선 순위는 헨리 7세의 장녀이며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앞서 스코틀랜드로 시집가서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제임스 6세는 헨리 7세의 현손자이며 마거릿의 증손자였기에 혈통면에서도 최우선 순위였고, 엘리자베스의 항렬상 손자뻘인 6촌으로 나이도 적절했다.
스코틀랜드 역시 종교개혁으로 장로회파 개신교 국가가 되었기에,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과 로마 가톨릭에 치를 떠는 국교회 교도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후계자감이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는 전임 메리 스튜어트 시절 어그로를 끈 것과 달리, 잉글랜드의 대외 정책과 크게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제임스 6세마저 칼뱅파 교리에 따라 교육을 받았었다. 1603년 임종이 가까워졌을때 여왕이 자리에 드러눕자 신하들이 (다 알면서도 혹시나)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냐 물어봤고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대답하니 신하들은 그게 누구인지 잘 생각나지 않아서 힌트를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여왕은 벌컥 화를 내면서"왕의 자리는 왕의 후손이 물려받아야지 농부의 자식이 물려받을 수 없지 않겠는가?"
라고 일갈했다. 실제론 여왕이 임종 전 비몽사몽할 때 재빠른 신하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오는 제임스 왕을 환영하러 나가서 온갖 아부를 떨고 있었다고..."스코틀랜드에 사는 친척밖에 더 있겠느냐!"
치세 말년에는 충신이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1601년 런던에서 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처형당하여 고령의 여왕은 심신이 지쳐갔고, 결국 1603년 3월 2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옆자리는 애증의 대상이던 언니 메리 1세가 안장되어 있다. 두 사람의 묘에 가보면, 두 자매의 애증이 드러나면서도 뭔가 초월한 것 같은 비문을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 1세가 세우도록 한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담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곳의 지명을 버지니아라고 부르도록 했다.[24] 그러나 처음 버지니아로 이주시킨 로어노크 식민지의 남자 85명과 여자 17명이 모두 풍토병으로 죽어버려서, 1607년 새로 건설된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아메리카 대륙 개발이 이루어졌다.[25]Regno consortes et urna, hic obdormimus Elizabetha et Maria sorores, in spe resurrectionis
왕권과 무덤을 함께 공유한, 엘리자베스와 메리 두 자매가 여기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들었노라
4. 엘리자베스 시대의 유명인[편집]
해적으로 유명한 사략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주로 에스파냐의 선박을 습격하는 등 많은 재보를 모았고 여왕은 이를 매우 치하하여 기사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훗날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가 침공해 왔을 때도 크게 활약했으며 위대한 잉글랜드의 영웅으로 후세까지 회자되었다. 다만 칼레 해전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략선 승조원들은 대개 역병으로 육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동시대의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연극을 특히 좋아했으며 청교도 신하들이 런던 내의 극장을 폐쇄[26] 하자 불호령을 내려 당장 연극을 재개하도록 했을 정도라고 한다.[27] 셰익스피어의 연극 역시 여왕이 무척 좋아했다. 셰익스피어는 여왕의 요청으로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란 작품을 쓰기도 했다.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쓸 때 무척 허겁지겁 만들었는데[28] 여왕은 몹시 즐거워했다고 한다.
5. 이야깃거리[편집]
5.1. 총신들[편집]
엘리자베스 1세는 젊고 유능한 남자들을 총애하여 곁에 두기로 유명했다. 여왕의 총애를 받은 총아들 중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여왕의 평생의 친우이자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경[29] , 월터 롤리 경[30] , 뛰어난 시인이자 자처해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잉글랜드 원정군을 지휘하다 전장에서 전사한 필립 시드니 경[31] , 유럽 최초로 조직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평 받으며 무적함대의 침략을 비롯한 수많은 외교적, 군사적 위기에서 슬기로운 대처를 한 프랜시스 월싱엄, 해적 출신으로 사실상 엘리자베스 1세의 전투력이자 오른팔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 마찬가지로 해적이자 주요 해군 제공세력이었던 존 호킨스, 여왕의 사촌으로 왕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당대 대프랑스 외교의 중심에 있던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 당대의 명재상이자 잉글랜드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32] ,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던 마운트조이 남작 찰스 블라운트 경, 레스터 백작의 양자[33] 이자 여왕의 말년에 특히 총애받았던 에식스 백작[34] 등 많은 청년들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또한 여왕은 프랑스의 앙주와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35] 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36]
이렇게 기나긴 여왕의 남자(...)들의 목록을 늘어 놓으니 은근히 막장 삘이 나기도 하다. 그러나 야사나 아침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부분은 접어두고 이렇게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주위에 두고도, 그 권력의 핵심을 항상 쥐고 있었다는게 엘리자베스식 리더쉽의 성공적인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의 정책 결정 과정은 주로 국무재상이자 왕실 내각의 수장이었던 벌리 남작이 큰 외교적 틀을 세우고, 프랜시스 월싱엄 경 휘하의 마드리드에서 모스크바까지 전 유럽에 포진해 있던 정보와 외교 네트워크가 실무를 집행하면, 사적으로 여왕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레스터 백작이 애교스런 연인의 속삭임(...)으로 여왕을 설득하고 이러한 중신들이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확실하게 무게를 실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스템이 그렇게 안정적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대신들이 알아서 일 처리를 하고 군왕은 결정적인 대목에서만 개입하는 시스템은 권력의 핵심이 흩어지고, 대신들 몇몇 중심으로 왕실 내 계파가 형성되는 역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시스템의 취약함이 드러난 경우가 파리에 주재한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스테포드가 스페인 정부에게 뇌물을 먹고, 벌리 남작과 프랜시스 월싱엄 사이의 미묘하게 껄끄러운 관계를 이용해 스페인을 위한 이중 첩자질을 한 경우가 있었다.[37]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와 봉건적 귀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하루도 왕권이 안정적인 날이 없었던 16~17세기 유럽 왕실에서 이렇게 걸출한 신하들을 밑에 두고 이러한 인재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신뢰를 주면서도, 또 그 잘난 대신들이 왕권을 날로 먹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런 저런 가십거리와 막연한 낭만주의적 역사관 속에 어느 정도 묻힌 감이 있는 군왕이자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1세의 역사적 위대함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38]
5.2.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의 관계[편집]
야사에 의하면 애인들은 몇 명 있었고, 사학자들도 엘리자베스에게 애인이 아예 없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분위기. 과연 엘리자베스 1세의 애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차고 넘치는데, 대표적인 애인 후보로 어렸을 때부터 친했고 나중엔 그녀의 심복이 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1532~1588)경이 있다.
야사가 아닌 정사에도 그녀와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었음이 드러나 있다. 아직 공주였을 때 형부인 펠리페 2세가 '엘리자베스는 로버트(더들리)와 결혼하지 않으면 처녀로 늙어죽지 싶어.'라고 말했을 정도. 또 엘리자베스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했던 더들리 경은 그녀가 어릴 때 이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곧잘 말했다 한다. 엘리자베스는 어디를 가든 더들리 경의 거처가 자신의 거처와 바로 옆에 붙어 있도록 했다. 20년 넘도록 외국에 나가기는 커녕 곁에서 잠시 떨어지지도 못하게 눈치를 주었으며, 심지어 더들리의 첫째 부인이던 에이미 더들리(1532~1560)를 청부살인했다는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39]
에이미 더들리는 지방귀족이던 존 롭사트 준남작의 딸인데, 아버지나 이복 아우인 아서와 사촌 오빠인 스펜서 롭사트에게 보낸 편지를 봐도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서 "독살을 염려하여 음식을 늘 개에게 먼저 먹이고 나서 먹는다. 남편은 날 언제 죽일지 모른다. 불안해서 잠도 못 잔다."고 하소연했다. 준남작과 스펜서는 기겁하여 손수 부하들과 에이미 곁을 지키면서 감시했는데, 결국 에이미는 1560년 9월 8일 일요일 오전에 계단에서 넘어져 목뼈가 부려져 죽고 말았다. 일요일이라 예배를 드리고자 지키던 이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갑자기 죽고 만 것이었다.
당연히 롭사트 준남작이나 이복동생 아서나 사촌 오빠 스펜서는 에이미가 결국 살해당했다고 절규하며 평생동안 사위 더들리를 증오했다. 무엇보다 딱 2개뿐인 계단에서 넘어져 목뼈가 부러졌다는 게 이상하고, 그녀는 늘 조심성있게 다녔으며 죽음을 무서워했기에 이렇게 어이없게 사고사했다는 걸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1561년 8월 1일에 사건현장을 조사한 검시관들은 사고사라고 결론을 내렸으나 사람들은 더 믿지 않았다. 사건이 터진지 11달이나 지나서야 조사해야 뭔 짓이냐는 반발도 있었다.
실상 에이미 더들리가 타살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후대의 학자들이 에이미의 관을 파내 열어 보았으나 이미 안에는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로는 에이미가 죽을 경우 가장 의심받을 것은 더들리 경이었으므로 그 자신이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어찌됐건 당시의 조사로는 더들리가 무고하다고 증명되긴 했으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더들리는 두고두고 뒷손가락질을 받았고 정적들은 틈만 나면 이 사건을 들어 그를 공격했다. 하필이면 일요일이라 예배를 보느나 준남작과 형제와 친가와 부하들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시녀들도 없이 그녀가 무턱대고 밖으로 홀로 나갔다는 말을 더 믿지 못했다.
결국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더들리를 좋아했지만 남편으로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청혼을 받아줄 듯 말 듯 어장 관리를 하면서 결코 결혼만큼은 하지 않았다. 혹은 엘리자베스가 국왕의 신분이다 보니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자신보다 신분 낮은 남편을 맞아봤자 이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사실 더들리 경을 견제하는 대부분의 다른 귀족들이 거품을 물고 반대했다. 이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 더들리는 반역자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40] 의 아들이었고, 더군다나 더들리 자신도 오만한 인물이였던지라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고 인기도 없었다. 이로 인해 모두들 엘리자베스가 더들리 경과 결혼하는 것은 제 발로 왕관을 내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1세를 지지한 충신들이나 친척들도 더들리만큼은 질색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는 사람들조차, 워낙에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더들리를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왕에게 절대 좋을 게 없다고 대놓고 간언할 정도였다.
게다가 전 유럽에 로버트 더들리와 엘리자베스 1세가 서로 짜고 에이미 더들리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 점도 두 사람이 결혼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스페인, 프랑스, 러시아에 주재하던 잉글랜드 대사들이 "여기 사람들이 대놓고 '당신네 여왕이 신하와 결혼하려고 신하의 죄 없는 아내를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면서요?','여왕이 참으로 사랑에 미치셨나 봅니다? 유부남을 사랑하여 죄없는 유부녀를 죽이니 말이죠?' 란 말을 대놀고 해서 마음이 편치않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더들리와 결혼한다면, 그야말로 온 유럽에서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빈정거리며 손가락질 할 게 뻔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가 거부당한 일로 이를 갈던 러시아의 이반 4세는 이 소문을 듣고 "자기 신하와 결혼하고 싶어서 짐을 거부했구나." 라고 입만 열면 그녀를 헐뜯고 빈정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와 더들리가 정말로 결혼한다면, 잉글랜드의 국가적 위상이나 외교적 입지에도 큰 타격이 될 판국이었다. 여왕을 지지하는 충신들도 우리 영국의 위신을 그야말로 바닥까지 추락시킨다며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더불어 에이미 더들리의 아버지 존 롭사트 준남작은 지방의 작은 귀족이었지만, 딸의 죽음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고 런던에까지 와서 딸이 살해당했다고 상소문을 왕실에 올리며 하소연했다. 이것만으로도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파인 고위 귀족들이 롭사트 준남작을 돕는다는 소문까지 자자했다. 아무리 여왕이라고 해도 고위 귀족들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법이고, 그렇다고 준남작을 처형하거나 추방한다면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인상을 주어 역효과가 날 게 뻔했다.
더들리는 아내가 죽고 18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게 되기를 기다렸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여왕의 친척인 레시티 놀리스[41] 와 재혼했다. 이 결혼 후 그녀는 곧바로 여왕의 분노를 사서 궁중에서 쫓겨났고 엘리자베스는 평생 그를 증오했다. 물론 한참 후엔 다시 그를 용서하고 더들리 경이 그토록 원했던 네덜란드 파견군 사령관에도 임명했다. 더들리 경은 인품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평생 여왕에게 헌신하며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고, 나중에 더들리 경이 급사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고 한다.[42]
5.3.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과의 관계[편집]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의 오촌 조카로[43] ,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했을 당시 그녀는 보스웰 백작과 간통하고 남편 단리 경을 살해한 혐의로 폐위당한 상태였고, 스코틀랜드의 왕위에는 메리와 단리 경의 아들 제임스 왕자가 즉위한 상황이였다.[44] 그 이전에 메리는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2세와 혼인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로도 제위하고 있었지만, 프랑수아 2세가 메리와의 사이에서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두번째 남편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에 원래 메리의 친절한 언니를 자처하던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남편으로 다루기 쉬운 남자였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권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 더들리와 결혼해 낳은 후사에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준다는 조건도 함께 제시했다.[45] 하지만 더들리가 공공연히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알려진데다가 반역자의 후손이고 왕가와 혈연으로 이어지지도 않은 평범한 귀족에 불과했기에, 메리는 물론 그녀의 신하들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까지도 엘리자베스의 저 제안을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저 제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도 진지하게 권유한건 아니라고 하지만...
이후 메리 여왕이 풍채가 좋다는 이유로[46] 고른 두번째 남편은 당시 잉글랜드 궁정에 있었던 헨리 스튜어트(일명 '단리 경')이었다. 하지만 단리 경 또한 혈통상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47] 이 결혼으로 엘리자베스의 메리에 대한 감정이 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단리 경이 결혼 직후부터 술주정으로 아내를 학대했기 때문에 사이가 단단히 틀어져, 메리로서는 엘리자베스를 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사생활 측면에서도 최악의 패를 뽑고 만 셈.
보스웰 백작과의 간통과 단리 경의 살해 혐의로 폐위당하고 감금되어 있던 메리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위에도 언급된 그녀가 가진 잠재적인 위협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일단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유폐시킨 후 감시자를 붙였다.[48]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사이는 매우 미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평생 열등감과 우월감이 교차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메리는 태어나자마자 여왕이었고, 한 때는 프랑스의 왕비였으며 왕족으로서 평생 대접받았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이 생전에 평판이 좋지 못했고, 어머니의 사후 사생아로 격하당하여 어린 시절을 상당히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나 후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나라에서 지지받는 국왕이었지만 메리는 평판이 나빴고 이 당시엔 아예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에서 쫓겨난거나 마찬가지였다.
내적으로는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가 가지지 못했던 외모와 교양, 귀족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구도 많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히스테릭하여 친구를 쉽게 만들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학문을 가까이 하고[49] 각종 국내외 현안들에 통달한 반면 메리는 어려운 학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데다[50] 어린 시절 내내 프랑스에서 살다 보니 스코트어나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당연히 못했고 영어도 성인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했다.[51] 엘리자베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때로 국사를 위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절제하기도 했으나 메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자신의 의견이 신하에게 반대 당하면 한나절을 사실(私室)에 틀어박혀 지칠 때까지 울거나 드러눕곤 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의 사후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격하시키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 버렸다. 후에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와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복권시켰으나, 적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왕위 계승권은 인정이 되었기 때문에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지만 가톨릭쪽으로부터 가톨릭 교도인 메리 여왕에게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재위기간 내내 왕위를 위협받았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스튜어트와의 약혼이 깨진 뒤 분통을 터뜨린 헨리 8세가 누이 마거릿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버렸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당시 엘리자베스 1세를 제외하면 가장 신분이 높은 왕위 계승권자는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였다.
어찌되었건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잉글랜드에 머물게 되기까지, 그녀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내내 스코틀랜드와의 사이는 불편했다. 마냥 불편한 사이만은 아니었고 때로는 일시적으로 호전되기도 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여러 번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한때 회동을 가지기로 한 적도 있었으나 무산되고 말았고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메리는 스코틀랜드 본토에서 벌리, 월싱엄 등 잉글랜드 내 강경 개신교 세력의 사주를 받은 반프랑스 칼뱅파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잉글랜드로 망명을 오게 된다. 그런데 이전까지 메리를 견제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잉글랜드로 망명하러 오자 나름 혈족이자 같은 군왕으로서의 유대감을 느꼈는지,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히는 벌리와 월싱엄의 주장을 물리치고 계속 거절하며 무려 18년의 세월을 유폐된 것 치고 나름 안락한 생활을 메리에게 보장해 주었다. 벌리 경이나 월싱엄이나 이 시기를 전후로 초상화에서 늙은 점이 확 드러나며, 특히 벌리는 이 대목에서 "여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미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면에서 해석하자면 엘리자베스 1세 또한 막강한 신하들을 거느린 군왕의 입장에 서있었던 만큼, 아무리 위협이 된다 한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군왕을 폐위하고 죽이려고 한다'라는 발상 자체를 굉장히 불쾌하게 여겼다는 해석이 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 사후 그녀만큼의 통솔력을 가지지 못한 스튜어트가의 왕들이 제위하게 되고, 의회와의 반목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잉글랜드 내전과 찰스 1세의 사형이 일어나면서 엘리자베스의 예감은 제대로 들어 맞았다.
결국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왕위를 찬탈할려는 반란을 도모한 혐의로 사형당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훗날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잇게 되었다.
5.4. 기타[편집]
프랜시스 베이컨이 엘리자베스 1세의 숨겨진 사생아고, 베이컨이 때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는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설을 부정하고 있다.[52]
엘리자베스 1세가 사실 가짜라는 주장이 있다. 음모론의 주요 근거는 1. 집사와 유모가 사라진 점, 2. 뒤바뀐 필체, 3. 갑자기 완치된 충치 등등. 2015년 3월 8일 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나아가 뒤바뀐 엘리자베스 1세가 남자라는 주장도 있다. 위 기사의 내용 중 비슬리에서 매년 5월에 이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고 있다고 나오는데, 이 축제는 바로 남자아이를 여장시키는 것이라고.
소설 '드라큘라'로 유명한 작가인 브램 스토커(Bram Stoker)가 이것을 소재로 1910년에 소설인 '희대의 사기극(Famous Impostors)'을 내놓았다. 이것 뿐만 아니라 역사 추리 소설가 스티브 베리가 쓴 소설인 The King's Deception에서도 다루었다. 물론 이 설도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53]
엘리자베스 1세가 안드로겐 불응 증후군 환자 내지 인터섹스라는 주장도 있다. 그 이유로는 위의 성격 항목에서 보듯이 그녀가 보통 여자와는 다르게 매우 활발하고 승마와 사냥 등 남성적인 취미를 즐겼고 위 유전병의 보편적인 신체적 특징 중 하나인 가늘고 큰 손을 가졌다는 이유가 있다. 게다가 이런 유전병 때문에 일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고 한다.
미국의 작가인 폴 임이라는 사람이 쓴 책인 책 속의 책에 의하면, 잉글랜드에서 이역만리 떨어져있는 무굴 제국과의 교류를 추진한 바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는 대항해시대 시기라서 인도나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로의 무역이 각광받던 시점이라서 딱히 특이한 건 아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단순히 무역을 하는 수준을 넘어서 직접 무굴 황실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므로, 당대 기준으로도 꽤 대담한 시도였다. 실제로 당시 황제인 악바르도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 국가에 대한 관심이 커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친필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동서양 국가의 군주들끼리의 흔치않은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역사적 순간이었지만, 이후의 무굴 제국과의 관계가 우호적 교류가 아니라 무력을 동반한 침략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언변 능력이 뛰어나고 담력 또한 두둑했기에 여러 장소에서 연설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88년 8월 9일 틸버리 항구에 집결한 잉글랜드 육군을 상대로 한 틸버리 연설과 1601년 11월 30일 의회에서 행한 '황금의 연설(The golden speech)'이 대표적인 연설이다.
아버지 헨리 8세, 언니 메리 1세와 함께 한국사의 숙종과 그 후손들에 비유될 때도 종종 있다. 헨리 8세는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유능한 군주의 면모, 자주 벌였던 숙청, 다혈질 성미와 여성 편력 등이 비슷했던 숙종에, 메리는 잠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곧 박대당한 유년기, 짧은 재위기간과 결국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는 점이 비슷한 경종에 비교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 비교되는 왕은 바로 영조. 어머니가 지배계급 출신이 아니었고, 아버지 사후 이복형/이복언니가 왕위에 오르자 역모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형/언니가 죽이지 않아 목숨은 살 수 있었으며 이후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아버지를 닮아 성미가 까다롭고 불같으면서도 백성들에게는 소탈했으며, 개인적으로 박식했고 장수하며 오랫동안 왕위를 지킨 것도 공통점이다. 거기다 기묘하게도 엘리자베스는 오촌 조카 메리 스튜어트,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라는 당시 왕위 계승 서열이 가장 가까웠던 혈육을 결국 죽여야 했지만, 죽을 때는 그들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도 공통점이다.[54]
6. 인간 엘리자베스[편집]
6.1. 사자처럼 불 같은 성격[편집]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부친 헨리 8세를 닮았는지 무척이나 불 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보수적 시대상이 원하지 않던 강인한 성격으로, 그녀가 격노하면 신하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 심지어는 회의 중에 격노한 나머지 옥좌를 박차고 나가거나 국무대신의 뺨을 치거나 슬리퍼를 집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오랫동안 꽁해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잘못한 후에는 빠르게 고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55][56] 게다가 체격도 컸으니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그녀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여왕의 키가 170cm가 넘었다고 전하는데, 당시 남성들의 평균키도 170cm가 안 되던 시절이다.[57]
말년에도 그 성정은 여전해, 에식스 백작의 반란 사건 때 연루되어 변명을 하러 온 해링턴 경에게 무시무시한 분노를 퍼부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과연 헨리 8세의 딸"이라는 말이 나왔다.
자신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신하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싶으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소리질렀다. 자신이 암사자는 아니라도 사자의 새끼인 것은 확실하다고 했으며,[58] 스페인과의 전쟁 당시 포고문에서는 "나의 몸은 여인의 것이나 나의 심장은 잉글랜드 국왕의 것이다."라고 언명하기도 했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여성에 대한 편견[59] 에 가득 찬 신하들은 처음에는 여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나 곧 그녀의 남다른 판단력과 정치력에 감복하여 여왕을 칭송하였다.
육체적으로도 강인해서 승마와 사냥을 즐겼으며 매일 강도 높은 운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궁전의 회랑이나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춤, 특히 갤리어드(춤곡의 일종)를 즐겨 추었고 사망하던 해에 이르기까지 코란토 춤을 시연해 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신경질적인 면도 많았고 무척 까다로운 성품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신중함이 너무나 지나쳐서, 중대한 일은 일단 무조건 결정을 미루었다. 결혼에 대한 문제도 워낙 이런 식으로 결단을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더러 있다. 엘리자베스의 신하이자 유능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잠재적 반역자였던 메리 여왕의 처형을 주장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매번 그 결정을 미루기만 하자 진저리를 치며 "여왕 폐하의 우유부단함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60]
6.2. 뛰어난 학식과 재능[편집]
어려서부터 학업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공부벌레로도 유명했다. 하루에 3시간씩 독서를 즐겼으며,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고전을 번역하는 것을 소일로 삼았다. 특히 그녀는 라틴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한 면모를 보이는 등[61] 언어 쪽의 재능이 출중했다고 전한다.
특히, 로마와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말하며 쓰고 원전을 읽고 번역까지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장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 제국 상류층들조차도, 그리스어를 배우기 힘들어서 따로 그리스인 출신 가정교사까지 고용해가면서 빡세게 공부했고, 일반적으로 쓰던 라틴어도 후대 사람들이 읽고 쓰기를 익히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현대처럼 무슨 파파고가 있던 시절도 아닌 그 당시에 문헌과 자기 자신의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번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언어뿐 아니라 그 언어가 사용된 문헌에 대한 배경과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않고서는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지식인들 뺨치는 수준의 교양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외교관의 딸로 태어났던 생모 앤 불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귀족 여성들도 남성 못지 않게 열심히 교육시키는 풍조 덕분에 그녀 역시 어렸을 적부터 방대한 지식을 쌓아나갔으며, 여왕이 되어서도 각종 국내외 현안에 통달하여 즉위 초기 그녀를 여성이라 얕잡아보고 있던 고문관들을 감탄시키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궁정 방마다 책을 가득 채워 놓아 혹자는 '잉글랜드 궁정에 처음 들어가 본 사람은 왕궁이 아니라 대학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여왕의 시녀들도 식견이 넓어야 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번역하거나 성서를 읽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는 여왕을 위해 난해한 학술서를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재위 말년의 일이다. 폴란드 대사가 방문하여 엘리자베스의 어전에서 무례하게도 의전을 무시하고 라틴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62] 감히 여왕에게 있을 수 없는 위협적인 표정과 태도에 모두가 기가 막혀했으나 여왕은 즉시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유창한 라틴어로 대사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여왕이 "맙소사, 경들. 오늘 하도 안 쓴 지 오래되어 녹슬어 있던 라틴어를 본의 아니게 연습해 보았소!"고 외치자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6.3. 백성에겐 자비로운 군주[편집]
백성들에게는 당시의 군주상과는 대조적인 자비로운 군주로, 여왕은 잉글랜드 왕실의 연례 행사인 국내 순행을 매우 즐겼다. 이렇게 백성에게 자비로웠던 점은 선대 여왕이자 언니인 메리 1세와도 비슷한데, 메리 1세가 백성들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배웠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의 도로 사정을 생각해보면 마냥 즐거울 리만은 없는 험난한 여정이었으나 그녀는 연례 순행을 매우 즐거워했고 가는 곳마다 많은 환영을 받았다. 여왕이 가는 도시마다 각종 행사와 환영회가 벌어졌으며 이후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여왕은 만나는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무례한 태도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런 소탈한 면이 백성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6.4. 인상과 건강[편집]
참고로 현재 남은 초상화를 보면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쪽을 더 많이 닮았으며 아름답다기보다는 잘생긴 여장부형이었다 전해진다. 아버지에게서 붉은빛이 도는 금발과 매부리코를, 어머니에게서 검은 눈과 가무잡잡한 피부를 물려받은 듯하다.
즉위 전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후에 천연두를 앓았기에 얼굴에 다소 흉터가 생겼지만 흉한 정도는 아니었고, 어머니 앤 불린을 닮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달린 아름다운 손이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존 헤이워드 경에 따르면 '호리호리하고 자세가 곧았다. 머리카락은 연한 금발에 가까웠고, 이마가 넓고 매끈했으며, 눈은 근시였으나 생기가 넘치며 상냥했고, 코는 약간 매부리코였다. 얼굴형은 좀 길었으나 감탄할 만한 미모를 자랑했고, 위엄이 조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키가 175cm로 당시에는 물론 현재 기준으로도 여성치곤 키가 상당히 컸다. 그 시대에는 군주의 키가 곧 군주의 위엄이라고 인식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큰 키를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역시 미모와 장신으로 유명했던 메리 여왕과 관련된 일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자신과 메리 스튜어트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운지를 물었다. 메리가 훨씬 더 미인이라는 세간의 평이었지만, 주관적인 질문인데다가 굳이 엘리자베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사신은 "엘리자베스 여왕님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우시고, 메리 여왕님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우십니다."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이번에는 키가 큰가를 물었다. 이번엔 객관적인 질문을 받고서는 사신이 정직하게 "우리 여왕께서 더 크십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놀라워하며 "그럼 너무 크군. 내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말일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메리 스튜어트의 키가 엄청 컸던 건 사실로, 무려 180cm가 넘었다. 성인 남자의 평균키도 160cm 중반 밖에 안 되었던 16세기의 여자인데도!
승마와 사냥 등 운동을 즐기는가 하면, 당시 귀족 사회에 유행하던 과식 풍조와는 달리 식사시간을 따로 정해두지 않고 배고플 때마다 허기를 잊을 정도로만 조금씩 먹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달콤한 것을 많이 먹으면 입냄새 또한 달콤해질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내내 치통으로 고생을 했다. 1578년에는 끔찍한 치통에 시달렸음에도 '외과적 수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버텼다. 이때 런던 주교인 에일러가 용감히 나서서 그렇게 끔찍한 치료가 아니라며, 여왕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충치 하나를 먼저 뽑겠다고 제안했다. 1578년 12월 그가 치료받는 모습을 본 여왕은 9개월간의 고통 끝에 드디어 자신의 치아를 뽑아도 좋다고 윤허했다. 그 이후 치아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앞에서는 금기가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가 충치를 남김없이 뽑은 다음 죽만 먹고 산다는 소문이 들리자, 여왕은 절대로 더는 이를 뽑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때문에 평생 치통과 잇몸병에 시달렸으며 그로 인해 얼굴과 목에 신경통이 생겼다. 당시 자료를 보면 뺨이 부풀었다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종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훗날 한 외국 사절은 말년의 그녀를 보고 "치아가 매우 누렇고 고르지 못하며 대부분 빠져 있었다."고 했지만,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아 전부를 잃지는 않았다. 다만 합죽이가 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천을 두껍게 접어서 입술 밑에 끼우고 다녔다고.
달걀 흰자, 달걀껍질 가루, 명반, 붕사, 양귀비 씨 등을 섞어 만든 로션을 발라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마조람[63] 또는 장미수를 향수로 썼다. 머리카락은 나뭇재와 물을 섞은 잿물로 감았다고 한다. 또한 피부의 탄력과 미백을 위해 수은을 발랐다고 한다. 안색이 창백했던건 위의 로션보다는 수은 탓이었을 것이다. 수은이 혈액의 공급을 일시적으로 방해하여 피부를 창백하고 탄력있게 만들어주기 때문. 이때문에 부작용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7. 평가[편집]
많은 영국인들이 엘리자베스 1세가 비록 내정에서의 실수와 말년이 되면서 반란에 시달렸다는 어두운 면이 있었어도 여왕이 다져놓은 기반 덕에 대영제국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정도로 영국 역대 왕조의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여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지도와 위상은 한국에서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세종 대왕이나 현대의 미국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최고의 지도자로 대우받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랑 동급이나 그 이상이라 보면 된다.
7.1. 내정[편집]
여왕은 아버지인 선왕 헨리 8세 이후로 빈곤했던 나라의 재정을 꾸려가기 위해 왕궁 살림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검약을 실천했으며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로 동인도 주식회사를 통한 식민지 확장으로 재정이 늘었음에도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덕분에 당시 빈곤하던 왕실과 잉글랜드의 재정을 많이 살릴 수 있었고 빚도 상당히 줄였으며 이렇게 건실해진 왕실은 귀족들에게 손을 벌릴 이유가 없었기에 귀족들은 왕실에 압박을 넣을 명분이 없었고 그 영향력도 줄어들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물론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 관리들의 임금은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검약은 왕실 재산을 최대한 매각하고, 영지나 궁전을 귀족들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그녀는 보석 컬렉션과 드레스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살아있던 당시 이미 수천 벌의 가운을 소유했으며 방대한 보석 컬렉션은 교황마저도 탐을 냈을 정도라고 한다.[64][65] 특히 진주를 많이 수집했는데 당시 진주는 아주 귀한 보석이라서 어지간한 왕족이나 귀족도 갖기 힘든 것이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그걸 대량으로 수집했다. 초상화에도 진주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아무래도 화려함을 과시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치품들을 수집했다는 해석도 있다.
귀족들이 원하던 왕과 국회의 관계 개혁이나, 당대 내정에서 가장 민감한 세금 문제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받는데, 내정에 관해서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던 왕"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신하들이 왕명을 받기 전에는 물러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더 이상 말하기 싫다고 자리를 떠나버리기도 했다.[66]
모든 문제의 결정을 임시적으로 신하들한테 미루고 문제가 생기면 그들에게 죄를 물어 숙청하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67]
결국 이 세금 문제는 후계자인 제임스 1세가 뒤집어 써야 했고, 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신하들에 의해 목이 잘리기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
당시 정치의 풍조상 궁정 내에는 여러 파벌이 있었으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엘리자베스는 때로 변덕을 부리거나 은전을 내림으로써 이러한 파벌들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견제했다. 하지만 통치 말년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애를 먹었다.
7.2. 국방[편집]
엘리자베스는 당시 초강대국 스페인의 군주 펠리페와 연을 맺은 메리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만큼 스페인과의 외교는 매우 안좋을 수 밖에 없었고 영국이 대외로 나오려면 스페인과의 전쟁은 필수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당시 약소국이였기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네덜란드의 독립활동을 비밀리에 지원하면서 해군의 신무기이자 스페인 해군이 운용하는 함포보다 사정거리가 더 긴 캘버린포를 설계 및 양산하였고 잉글랜드는 어차피 상륙을 허가한다면 그냥 게임 끝이라고 생각, 도버 해협을 지킬수 있던 해군이 가장 중요하다며 육군보다 군함을 적극적으로 건조하고 전쟁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약소국이던 잉글랜드가 별다른 대외 전쟁을 벌일수 없었고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금은보화가 탐나던 상황에서 이 스페인으로 가는 금은보화라도 얻기 위해 사략사업[68] 즉, 해적업을 장려하며 스페인이 마야나 아즈텍 등 중남미에서 약탈한 수많은 황금과 재화를 적재한 스페인 함선을 공격하며 이득을 보았다.
스페인은 계속 당하니까 영국 사략함대의 대표 인물이자 해적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참수하라고 요구했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거절, 당연히 스페인이 아득바득 이를 갈던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교 신도이자 친척인 메리 스튜어트를 참수하는 일이 발생, 이에 스페인은 가톨릭 교도 보호를 전쟁 명분으로 삼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전쟁이 터지자 가장 전투경험이 많은 드레이크를 해군 총 지휘관으로 임명하였고 잉글랜드 해군 - 네덜란드 독립파 해군이 연합한 해군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맞서 칼레해전을 통해 대승을 거둔다. 그렇게 참패를 겪은 스페인은 불구가 되어 재건하는 1년동안은 영국은 대외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다시 함대를 재건중이라는 첩보를 듣고 승리한지 단 1년만에 드레이크와 노리스 장군을 다시 스페인으로 보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으나 일격은 실패하고 되려 이 패전을 통해 스페인 해군이 다시 부활한다.
사실상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지만 스페인을 상대하기 위해 차근차근히 육성한 해군들은 추후 식민지를 늘리는데 유용하게 쓰였고 엘리자베스 1세의 재임기간에는 잉글랜드가 세계를 주름잡는 원동력이 되었다.
7.3. 경제[편집]
엘리자베스 1세는 왕권은 돈에 나온다는 인식때문에 돈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던 군주였기에 그녀의 전성기때는 국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 백성들의 돈주머니를 풍족하게 하기 위한 정책을 많이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기에 추밀원을 통해 유능한 정치가를 등용했고 정치는 성실청, 종교는 특설고등법원을 창설해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뒤 본격적으로 경제진흥 정책을 차질없이 진행하였는데 첫 단추가 양모를 이용한 모직물 산업 장려였다. 이덕에 농민들은 농작지를 조금 줄여서라도 양을 키우는 목축지를 병행하면서 모직물을 만들면서 수입이 급속히 늘었고 그 덕에 농민들의 생활수준도 매우 높아졌는데 장점만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단점으로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목축지를 급격히 확대하다 보니 일부 농민들은 땅을 빼앗겨 떠돌이 신세가 되어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치안이 안 좋아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을 일을 시켜 다시 돈을 벌 수 있는 구빈법을 제정하며 일자리를 줌으로써 해결하였다.
이후에는 해상교역도 스페인과의 전쟁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식민지 확장과 교역에 집중하면서 국가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요인이 되었다. 이때문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전성기 시절에는 민중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로 불릴 정도로 경제를 잘 살려냈으나 문제는 말년서부터 터지기 시작한다. 엘리자베스1세가 죽기 7년전에는 흉년과 네덜란드의 대두로 무역 쇠퇴로 이어지면서 물가 폭등과 실업자 대량으로 터지기도 하였다.
7.4. 문화[편집]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국민들은 잉글랜드라는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음을 인지하자 마침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문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도 최고의 문학인으로 손 꼽히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철학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등장하는 성과를 얻게 되었고 민중들도 집안에 기본적으로 악기가 있을정도로 문화활동을 즐길수 있었다. 이 영향덕분에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이들이 여왕이 처녀라는 사실과 여왕을 기리기 위해 버지니아 라는 이름을 따서 붙일 정도로 사랑받는 군주였다.
7.5. 종교[편집]
물론 '이론상으론' 종교적 적대자들을 '반역죄'로 처형하였기에 '종교 때문에 죽은 사람의 공식적인 숫자'는 메리보다 확연히 적다. 메리 시대 5년 간 개신교도 284명 처형, 34명 옥사인데 비하여 엘리자베스 시대는 재위 기간이 45년임에도 9명 처형, 9명이 옥사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Elizabeth I, the 25-year-old daughter of Henry VIII and Anne Boleyn, ascended her throne on 17 November 1558. At first her emphasis was on a religious settlement. Her personal credo remains elusive, but she may originally have aimed to revive her fathers religious legislation, to re-establish her own royal supremacy and the break with Rome, and to permit communion in both kinds (bread and wine) after the reformed fashion, but nothing else. ... And yet, while the Settlement meant that England became officially Protestant, a huge missionary effort to win the hearts and minds of parishioners (especially those in remoter counties and borderlands) lay ahead. Outside London and the towns, the South-East, and East Anglia, Catholicism still predominated: the bishops and most parochial incumbents were Marians, and committed Protestants were a minority. Whereas Elizabeth and Cecil inherited all the negative and destructive elements of Henrician antipapalism and Edwardian Protestantism, they had inadequate resources to build the reformed Church, though it is false to see their task purely in confessional terms.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인 25세의 엘리자베스 1세가 1558년 11월 17일에 즉위했다. 먼저 그녀가 강조한 것은 종교적 결정이었다. 그녀의 개인적 신앙고백은 애매모호하지만, 그녀는 부친의 종교 법령들을 목표한 것으로 보인다. 곧 지상권을 재확립하고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개신교에 따라서 양형성찬(빵과 포도주)을 하되 그 외의 것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 그러나 종교적인 결정으로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은 교구민들(특히 먼 지역과 국경의 교구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런던, 사우스이스트, 이스트앙글리아 바깥에서는 가톨릭이 여전히 다수였다: 주교들과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은 메리 시대의 사람이었고, 헌신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소수였다. 반면 엘리자베스와 세슬은 헨리의 반교황주의와 에드워드의 개신교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들을 상속 받았다. 비록 순전히 교파적인 용어들로 보는 것은 잘못이겠으나, 엘리자베스와 세슬은 개혁된 교회를 건설할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Kenneth O. Morgan 편집, 《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ebook]
그러나 피터 마셜(Peter Marshall)이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 지적하듯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도덕적 우위를 호소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을 '이단 혐의'가 아니라 '반역 혐의'로 처형하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몇 명이 이단 혐의로 죽었는지를 가지고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는 것은 어렵다.
'공식적인' 희생자 숫자의 논리를 그대로 쓴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공식적으로'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72]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신교도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2017, [ebook][71]
오히려 엘리자베스는 반란과 엮여 있는 건수를 제외하고, 순수 가톨릭 신심 행위만으로 200명을 처형했다. 여기에 다른 비성공회 개신교에 대한 박해까지 추가하면 더 늘어난다.
오히려 엘리자베스는 초기 치세에 언니인 메리보다 종교 정책에서의 더욱 낮은 지지를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받았다..[73]The regimes of Henry VIII, Edward VI, Elizabeth and James I all put Protestants to death as well, for beliefs that were more radical than those permitted by the established Church of the time. In addition, Elizabeth executed almost 200 Catholics, in theory for treason but actually just for attempting to practise their religion. The executions that followed the rebellion of the northern earls add another couple of hundred to that figure.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모두 개신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당대 국교회가 허용하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믿음을 이유로.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2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이론상으론 반역죄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가톨릭 신심 행위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별개로 북부 백작들의 반란에 이어 일어난 처형 건수 수백명이 있다.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The total import of the evidence of both rebellion and will-making is that Mary's Catholicism attracted more spontaneous support from the English than Edwardian Protestantism or that of the early reign of Elizabeth.
전체적인 반란과 유언서들의 증거들을 종합해볼때 메리의 가톨릭 신앙은 에드워드의 개신교 신앙이나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의 그것보다 더욱 자발적인 지원을 잉글랜드인들로부터 이끌어내었다.[74]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게다가 재위 10년쯤이 넘었을때, 가톨릭 세가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한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75]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76][77]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게 없었다.the overall conclusion must still be that it was Marys Catholic Church that was the most popular among the English as a whole, and that had she reigned for even half as long as Elizabeth did let alone had she ruled for as long, and produced a Catholic heir then England would have been a Roman Catholic nation ever since.
전체적인 결론은, 잉글랜드인에게 전체적으로 가장 인기 있던 건 메리의 가톨릭 교회라는 것이며, 만약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절반 기간만 다스렸어도 ㅡ 그녀가 치세 동안 가톨릭 상속자를 낳았을지를 논외로 하더라도 ㅡ 잉글랜드는 계속해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2010, [ebook]
물론 엘리자베스가 근대 초의 유럽 군주 중 특별하게 엄청나게 잔혹했다거나 하면서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이는 (언니인 메리 1세에게서도 보듯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근대 초 유럽 군주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잔혹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잔혹성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특별히 예외로 취급하여, 휘그 사관의 재미있는 문학적 내러티브를 위해 사실을 끼워맞추는 것은 분명히 지양되어야 할 태도이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유럽 군주들이 그러하듯이 잔혹함과 개인적인 종교적 호오가 결합된 근대 초 유럽 군주로 봐야 할 것이다.
7.6. 엘리자베스 빈민법[편집]
7.6.1. 배경[편집]
7.6.1.1. 수장령[편집]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였던 헨리 8세는 앤 불린 이전에 첫번째 아내로 아라곤의 캐서린이 있었다. 캐서린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국왕 페르난도 2세의 딸로, 원래는 헨리 8세가 아니라 그의 형이자 왕세자 아서 튜더와 정략결혼을 해서 잉글랜드의 왕세자비가 되었다. 하지만 아서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일찍 과부가 되면서, 지참금 문제로 시아버지 헨리 7세에게 냉대를 받고 있었다. 이윽고 헨리 8세가 형 아서의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되고 아버지 헨리 7세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헨리 8세는 냉대받는 캐서린을 안타깝게 여김과 동시에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남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당시 17살의 나이로 23살이었던 캐서린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캐서린이 메리 1세를 제외하고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에 헨리 8세는 왕실의 후계 문제로 아들을 원하고 있었지만 캐서린이 낳은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사망했고, 자식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는 여아인 메리 1세 뿐인데 캐서린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이로 인해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을 낳아줄 아내를 물색하다가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빠져 그녀와의 결혼을 희망했다. 이를 위해 로마 교황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수용해 주길 원했지만,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캐서린의 조카였던 카를 5세를 두려워해 이를 불허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포기하지 않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강행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크랜머를 잉글랜드 교회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크랜머 대주교는 국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캐서린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해 버리고, 이에 교황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이유로 헨리 8세를 파문해 버렸다. 결국 이 일로 인해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은 이제부터 바티칸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내용의 '수장령'을 반포했다. 이후 로마 교황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잉글랜드내에 있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도서 재정을 통해 로마 교황청과 분리의 길을 걸었다.
수장령으로 문제가 된 것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부각된 문제가 부랑민 등 빈민을 어떻게 구호해야 하는가였다. 당시 인클로저 운동 등으로 부랑민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의 구호활동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권한을 잉글랜드의 왕실이 가져갔기 때문에 왕실은 빈민들을 구호해야 할 책임이 생겼고,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들어서 엘리자베스 빈민법을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7.6.1.2. 부랑자[편집]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계승문제로 일어난 백년 전쟁과 바로 이어진 장미 전쟁 등, 오랫동안 전쟁이 이어지면서 잉글랜드는 피폐해져 빈민이 생겼다. 백년전쟁, 장미 전쟁, 인클로저 운동으로 목축지 중심으로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여, 과거 소작농제로 일하던 임금 노동자 및 영세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돌게 되면서 부랑자들이 늘어났다. 그게 바로 인클로저 운동.
7.6.2. 평가[편집]
노동능력의 유무와 의지에 따라 구분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이 법안이 사회복지의 시초가 되었다는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초수급권, 조건부수급권과 같은 의미의 복지 서비스를 왕조 시대의 17세기에 이미 기초가 되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했다는것이다.
7.7. 총평[편집]
비록 과거 휘그 사관(Whig history)이 묘사한 극단적 미화는 오늘날 영국 사학계에서 밀려났으나, 40년이 넘게 재위하며 이후의 영국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거대한 군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여상차별 의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던데다 사생아라는 논란 때문에 입지적으로는 불안했으나 끝까지 왕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백성들과 접촉하기를 즐겨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내를 여러 번 연례 순행하기도 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군주에 대한 신뢰감과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과 인플레이션, 실업으로 백성들의 삶 자체는 1300년대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실제로 전쟁 중인 1595 ~ 1597년엔 여러차례 식량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검소한 태도와 여러차례의 순행은 그런 흉흉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는 평이 있을 정도. 하지만 뒤의 스튜어트 왕가가 잉글랜드 내전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풍파에 시달린 나머지 해가 갈수록 엘리자베스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게 되었다.[78]
무엇보다 비단 엘리자베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시절 부터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집중화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순수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생산하는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지출은 엄청나게 먹어대는 왕실 내각과 휘하의 관료 조직의 비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독립 전쟁 지원과 대 스페인 전쟁 등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시절 이러한 왕실 조직의 비대화는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물론 비단 엘리자베스의 책임만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결국 엘리자베스 시절 감당 못하게 커진 왕실 조직과 이에 대해 튜더 왕조 초기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의회와 지방 귀족과 젠트리 세력의 반발은 결국 훗날 잉글랜드 내전이라는 격란의 원인이 된다.[79]
History is properly read forwards, and the issue of the success or failure of Elizabethan government would be overtaken during the Personal Rule of Charles I by the more significant (perceived) threat to Protestantism and the internal security of the British Isles and Ireland that was represented by the policies of the king and Archbishop Laud. And yet, the late Elizabethan legacy of meagre public revenue and governmental malaise was in the end reversible only by the events and experiences of Civil War and Interregnum.
역사는 적절하게도 엘리자베스 정부의 성공 혹은 실패가 찰스 1세의 개인 통치때 전복되었다고 읽어낸다. 이는 찰스 1세와 Laud 대주교에 의해 대표되는 개신교와 브리튼 제도(諸島) 및 아일랜드의 안보에 대한 중대한(이라고 인지된) 위협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후기 엘리자베스 시대의 유산인 미약한 재정과 정책적 문제점들은 오직 내전과 공위시대의 여러 사건과 경험들을 통해서야 극복될 수 있었다.
《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Kenneth O. Morgan
사실 엘리자베스 본인의 치세만 하더라도 내부 가톨릭 파벌과 메리 스튜어트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반역 음모, 봉건적 자치권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북부 귀족들의 반란 등 내적으로도 충분히 굴곡이 많은 시대였다.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반란과 무관하게 단지 신심 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하는 등, 현대적인 관용과는 거리가 먼 정책을 펼쳤으나, 아무튼 간에 이러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버텨내고 40년을 재위하고 이후 영국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거대한 군주임에는 틀림 없다.
아버지에 못지않을 만큼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다. 사생활에 관련된 이런 저런 여담들과 무적함대니 국교회 성립이니 하는 단발적 사건들 때문에 진지한 그 치세의 역사적 의미가 묻히는 감이 있는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고(...)
사회복지의 역사에 반드시 나오는 왕이 엘리자베스 1세라는것도 눈여겨봐야하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라 일컬어지는 이 법은 1601년에 시행되어 많은 빈민을 살렸다. 노동 능력의 유무와 의지에 따라 구분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이 법안이 사회복지의 시초가 되었다는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초수급권, 조건부수급권과 같은 의미의 복지 서비스를 왕조 시대의 17세기에 이미 기초가 되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했다는 것이다.
8. 대중 매체에서[편집]
- 영국의 SF 드라마(영드)《닥터후》에서는 뉴 시즌 3 에피소드 2 후반부에서 사건이 다 해결된 후에 나이 지긋하게 먹은 외모로 등장해서 닥터를 보더니 분노해서 "저 놈의 목을 베어라!"라고 명한다.[80] 이후 닥터후 50주년 스페셜에서 등장하는데, 10대 닥터와 데이트를 하다가 타고 오던 말이 자이곤이었다던가, 그 자이곤이 자신으로 변신했다던가 하는 기이한 수모를 겪는다. 자신으로 변장한 자이곤에 의해 처리되어 10대, 11대, 그리고 전쟁의 닥터를 런던 탑에 가두나, 사실 처리된 건 자이곤쪽이고 엘리자베스 1세가 일부러 닥터들을 끌고 오기 위해 한 일. 자이곤들의 계획을 알려주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겸사겸사 10대 닥터와 결혼을 치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사건이 해결되는 대로 다시 돌아와달라고 했지만, 엘리자베스가 노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수 명령을 내리는 게 어쩌면 매우 당연한 반응(...)
- 《죠죠의 기묘한 모험》1부에도 타커스와 브루포드의 과거 장면에서 등장. 다만 메리 스튜어트의 관점에서 본 거라 그런지 거의 간사하고 악하게 서술된다. 성우는 케이쵸 유카.
-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지배자로 문명 1부터 문명 6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지도자로 개근했다. 4에서는 재정적, 철학적이라는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빠른 테크와 잘 뽑혀 나오는 위인으로 고난이도에서도 적절한 플레이를 할 수 있고 5에서는 해상 유닛의 이동성이 2타일 증가한다. 초반 해상에서의 정찰에 이점이 있으며 빠른 속도로 확장, 침략, 점령이 용이하다.
AI로 등장할 시 무시무시한 오지랖과 시비로 치를떨게된다.자세한 건 문명 5/등장 문명/영국 참조. 6에는 빅토리아 여왕에 밀려 등장하지 못했었으나, DLC인 리더 패스를 통해 등장이 예정되어 있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능력치가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6,5인 군주로 나온다. 참고로 이 게임의 능력치 상한은 6이다.
- 헨리 8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튜더스》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 이원복은《먼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에서 그녀를 칭송하면서 반대로 메리는 악녀같이 그려내고 왜곡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일반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군주인 것은 맞지만 분명 과오도 있는 인물인데,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탄압을 제외하고는 전혀 흠이 없는 완벽한 군주처럼 묘사했다. 외정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순[81] 정도로만 딱 멈추고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넘어갔다. 다만 개정판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워낙 업적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메리 1세 때 못지 않게 피가 많이 흐르던 시기라고 지적을 하여 정확도와 비판을 추가하기는 했다.
-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오페라《로베르토 데브뢰》[82] 에서는 엘리자베타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83] 거기다 히로인인데, 이미 70세의 노파 할머니(...). 심지어 내연남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연인 관계로 기록된 에식스 백작이다. 근데, 여기서 에식스 백작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 밝혀서 감금된 상태이지만, 여왕은 거기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에식스 백작이 자신을 다시 사랑해 줄 거라는 바람을 가진 여인으로 그려진다.[84] 근데,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거기에 열 받아서 곧바로 사형 집행서에 사인해버리는 질투녀(...).[85] 하지만, 마지막에 에식스 백작이 처형되자 이에 후회하게 되고, 곧바로 몸이 나빠져[86] 스코틀랜드의 제임스에게 물려주라는 유언을 하는 것으로 오페라의 끝맺음을 장식한다. 오페라 자체는 벨 칸토답게 실제 역사보다는 멜로물이 주로 이뤄졌다는 평.
- 도니제티의 또 다른 오페라이자 메리 여왕의 최후를 그린《마리아 스투아르다》에선 위의 오페라보다 젊었을 적의 모습이며, 여기서도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에식스 백작의 양아버지였던 로버트 레스터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타이틀롤 메리 스튜어트를 페이크 주인공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메리의 본격적인 등장은 2막부터니까...근데, 실러의 희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나 로베르토 데브뢰와 마찬가지로 픽션이 첨가되어 있다. 여기서 레스터는 감옥에 갇힌 메리 스튜어트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가만히 있지않고 당연히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서 질투하게 되고, 이에 메리 사형 집행서에 사인까지 해준 다음 레스터 경에게 메리의 죽음을 직접 보라는 냉정한 말까지 한다.본격, 질투의 화신 엘리자베스 1세이 오페라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은 실제 역사에서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메리 스튜어트와의 대면에서 서로 신경전을 부리는 부분인데, 이는 실러의 가상으로 도니제티가 이 장면을 아주 화끈한 이중창으로 만들어 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87]
- 《어쌔신 크리드: 레벨레이션》에서도 언급된다. 여기서는 암살단과 대립하는 템플 기사단의 일원인 걸로 나오며, 선악과를 가져간 것도 그녀라는 설정.
- 《역사를 만든 여왕 리더십 시리즈》의 첫 번째 여왕 주연으로 나온다. 작중 애칭은 베스. 2권에서는 극초반부와 극후반에만 등장. 초반부는 다음에는 언제 볼 수 있겠느냐는 고정 주인공 아인의 질문에 한동안 바빠서 잘 못 볼 거라고 대답해주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아인에게 '네가 더 바쁠 것이다'라는 아인의 두 번째 시간여행의 떡밥을 남기고 사라진다. 극후반부에서는 두 번째 여왕 주연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만나는데,(작중 애칭은 테리.) 다른 과정을 거쳐서 여왕이 된 두 사람이다 보니, 심상치 않게 본다.[88] 1500년대의 사람인 엘리자베스는 1700년대의 테레지아를 전혀 몰라서 당연히 '누구야, 그게?'라고 반응. 이에 자존심이 상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시골 같은 영국 여왕이란 말이지? 네 후손들 도움을 잘 받았음'이라며 광역도발을 시전해 말싸움을 한다. 3권 초반에서는 스페인이나 중신들과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인을 찾아오며,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여전히 영국이 더 크냐, 오스트리아가 더 크냐 하는 별 의미도 없는 싸움 때문에 아인을 잠도 못 자게 시달리게 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 영화《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는 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 세자르 카푸르 감독이 연출한 1998년 영화《엘리자베스》와 2007년 개봉한《골든 에이지》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특히 1998년도 작품은 케이트 블란쳇의 본격 데뷔작이다.
당초 케이트 블란쳇이 엘리자베스 1세역을 맡게되자 웬 듣보잡이 저런 중요한 역을 맡냐면서 사람들은 흥행 실패를 예상하였지만, 3,0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서 8,2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대박'까진 아니지만 '중박' 정도의 흥행엔 성공했고,# 뭣보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이 '대박'이었고, 블란쳇은 바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화려하게 데뷔한다.[90]
9년 뒤 블란쳇은 세자르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춰《골든 에이지》에서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는다. 2007년 작의 주된 배경은 칼레 해전이며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불꽃튀는 대결이 주요 내용.
재미있는 점은 1998년 작에서 로버트 더들리 경과 사랑에 빠졌던 엘리자베스가 2007년에는 잉글랜드 사략선 선장 월터 롤리 경과 연애 플래그가 선다. 칼레 해전이라면 흔히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생소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월터 롤리 경은 서구권에서는 대단히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 잘해봐야 탐험가 내지는 사략선장인 드레이크에 비해, 롤리는 탐험가이자 군인이면서 동시에 학자, 역사가로 이름 높은 인물로 결코 드레이크에게 밀리지 않는다. 더욱이 북아메리카에 처음 정착을 시도하고 그 지역을 엘리자베스와 관련이 높은 이름인 '버지니아'로 명명한 게 롤리 경임을 생각하면 결코 듣보잡을 내세운 것이 아닌 것. 참고로 오늘날까지 해양력의 가치를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곧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을 한 주인공도 롤리 경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칼레 해전에서는 잉글랜드가 화공으로 아르마다를 개발살내버리지만 실제로 아르마다가 패배한 이유는 악천후에 휘말려서 아일랜드 쪽으로 빙 돌아서 본토로 퇴각하려다 박살난 것이다. 실제로 전투로 격침된 배는 5척도 되지 않으며 잉글랜드의 피해도 그리 치명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펠리페 2세는 아르마다의 전멸 소식을 듣고도 별로 실망하지 않았으며 곧 비슷한 규모의 함대를 재건한다.
2007년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중기, 여왕 엘리자베스는 처녀의 몸을 지킬 것을 표명하며 결혼에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런 여왕을 못마땅해한 주교들과 신하들은 여왕에게 후사를 위해 결혼을 하시라며 끈질기게 간청을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난 불가능한 쪽에 흥미를 느낀다"라며 무심하게 대꾸하여 자신은 결혼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피력해 신하들을 데꿀멍시킨다. 공적인 자리에서 결혼 얘기를 꺼낸 신하의 뒷통수를 후려 갈기기도 하는데 어지간히도 거슬리게 했던 모양.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잉글랜드로 도망왔다가 엘리자베스에 의해 유폐된 메리 여왕는 엘리자베스를 처치하고 자신이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와도 연결창구를 만들어 순조롭게 계획을 진행시켜 나가는 듯 보였으나... 문제는 메리의 계획이 오래 전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신하들에 의해 뒷조사 당해 간파당해버렸다.
당연히(...) 엘리자베스를 노렸던 암살 계획은 실패했고, 메리 여왕을 비롯한 음모자들은 전부 반역죄로 목이 잘린다.
메리의 처형은 잉글랜드를 침공할 구실이 없던 펠리페 2세에게 좋은 떡밥이 되었고, 펠리페는 온 유럽에 명성이 자자하던 아르마다를 잉글랜드 정복을 위해 출진시킨다.[92] 한편 엘리자베스는 사략선 선장 월터 롤리 경에게 푹 빠져 연애 감정까지 느꼈으나, 문제는 롤리가 엘리자베스에게는 별로 호감이 없었고 그녀의 시녀였던 베스에게 접근해 사랑에 빠지고 결국 임신까지 시켜버리고 만다. 여왕의 시녀가 여왕의 승인 없이 결혼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고, 더군다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이 가장 아꼈던 시녀에게 NTR당한 엘리자베스는 분노로 눈이 뒤집혀 롤리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 시각, 아르마다는 도버 해협인근까지 접근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잉글랜드 본토에 상륙할 기회를 노린다. 그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의 백년 전쟁 이후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군사력이 시망상태였고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해군쪽은 선왕인 헨리 8세가 신경을 써둔 덕분에 사정이 좀 나았으나, 육군의 상태는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의 상태였다. 스페인 아르마다의 병력 1만 + 펠리페의 친구인 프랑스 파르마 공작의 휘하 병력 1만 5천을 합한 총합 2만 5천 대군에 맞서야 하는 잉글랜드의 병력은 꼴랑 3천명. 이런 압도적인 전력차에서 스페인군이 상륙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잉글랜드는 끝장이었다. 상륙을 허용하면 육군이 순식간에 박살이 날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상륙을 막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롤리를 석방하여 스페인과의 전투를 이끌게 한다.
해군을 출전시킨 후 엘리자베스는 농부들과 죄수들까지 풀어 무장시키고 몸소 갑옷을 입고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굳힌다. 한편 바다에서 잉글랜드 해군은 아르마다에게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있었고 전멸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스페인군의 잉글랜드 상륙이 임박한 최악의 상황에서 롤리는 고심 끝에 화공 전술을 시전하여 악천후에 오밀조밀하게 뭉쳐있던 아르마다에 폭격.
좁은 해협에 밀집해 있던 아르마다는 닻줄을 끊고 튀려고 하나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뒤엉켜 모조리 불타 개발살이 났고 펠리페는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말아먹은 패배에 정신줄을 놓고 리타이어해버린다. 이후 대례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지도위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맺는다.[93]
- 1912년에 무성영화로 제작된 미국-프랑스 합작 영화도 있다. 이 영화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첫 작품이라는 점에 의의가 크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19세기의 최고 연극 배우로 알려진 사라 베르나르가 맡았다.영화 정보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녀가 왜 처녀성에 집착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준다.
- HBO TV미니시리즈 톰 후퍼 감독의《엘리자베스 1세(2006년도)》에서 헬렌 미렌[94] 이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아 혼인 하지 않은 중년 처녀여왕의 히스테릭한 연기와 베테랑 신하들을 노련하게 제압하는 절대 군주 두 가지의 모습을 오가며 엄청난 연기력을 펼쳤다.
- 2018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메리 스튜어트 여왕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가 개봉되었다.[96] 배우는 마고 로비가 맡아 상당히 인상적인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하였다. 일생 최고의 정적이자 라이벌이었지만 친척이기도 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는 나름대로 서로를 자매로 여기며,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해야한다는 인식이 당연했던 시대 속에서 같은 일국의 여왕으로서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개인적인 애정과는 별개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계,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적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주장하는 메리 때문에 갈수록 대립하게 된다. 끝내 스코틀랜드에서 폐위되어 망명한 메리와 만나 제발 자신을 도와달라는 그녀의 애원에 흔들리지만, 결국 자신의 왕위를 지키고 잉글랜드의 국익을 우선시함으로서 메리의 처형을 방관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여왕으로 우뚝 선다.
-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2부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에서도 등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고 난 시점 근처에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위시한 영국 사략선단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등장한다. 당대 유럽 최강국인 스페인을 해전에서 이긴 덕인지 엘리자베스는 상당히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는다. [97] 이 소식을 전해들은 히데요시는 스페인의 세력이 어느 정도 약해졌으니 명나라를 친 후 루손(필리핀)을 치는 것도 해봄직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뮤지컬 엘리자벳과 모차르트!, 레베카와 마리 앙투아네트, 베토벤으로 유명한 실베스터 르베이와 미하일 쿤체 콤비가 일본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는 과정을 그려낸 팩션 뮤지컬을 제작한 적이 있다. 제작은 일본 토호 주식회사. 뮤지컬 제목은《레이디 베스(Lady bess)》이며, "왜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위대한 군주로 기록 되었으며, 죽을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처녀왕으로 불렸을까?"를 베이스 삼아 극을 구상했다고 한다. 타이틀롤 베스는 다카라즈카 설조ㆍ주조 여역 톱스타 출신 하나후사 마리[98] 와 성우출신 히라노 아야[99] . 연출감독은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벳과 토호판 엘리자벳, 모차르트!로 유명한 코이케 슈이치로(小池修一郎)[100] . 2014년 도쿄 제국극장(帝国劇場)에서 초연되었고[101] , 2017년에 넘버와 내용 흐름을 수정하고 개선한 버전으로 재연되어 이 때의 실황이 W캐스트 별로 DVD가 발매되었다.[102] 2022년에 스위스판[103] 이 공연되었으며, 현재로서는 르베이 뮤지컬 작품 중 유일한 국내 미상연작이다.
성인이 된 베스는 어릴때부터 공부와 책읽기를 즐거워하며 지금도 부친에게 선물로 받은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성서를 읽고 있다. 그때 로저 애스컴이 들어오면서 베스가 읽은 책을 보자마자 "그 책은 메리 여왕이 금서로 지정하고 있으니 숨기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캣 애슐리에게 건네준다. 그러자, 베스가 그 책은 그냥 다른 책이 아니라며 아바마마로부터 받은 선물이고, 언니인 메리도 자신을 심문하진 않을거라고 말한다.
베스: 이건 그냥 다른 책이 아니에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바바마와 같은 잉글랜드의 거울이죠. 언니인 메리도 저에게 뭐라하진 않을거에요. 아바마마의 애독서이니 괜찮습니다. 신약성서인 작은 책. 아바바마로부터 물려받은 책. 편안함과 번쩍임이 있는 소중한 책이에요.
베스: 제가 왜 어미때문에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합니까?모욕때문에 화가 나버린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직접 이복언니인 메리 여왕에게 편지를 쓰겠다며, 가디너 주교를 따라가 신약성서를 찾아오기 위한 마차를 준비해달라 부탁한다.
베스가 마차를 타고 가디너 대주교를 뒤쫓던 도중 그만 숲에서 마차가 고장나게 된다. 마차가 수리되는 동안 베스가 잠시 나와 음유시인이자 방랑자이면서 메리 튜더의 정책에 반발하는 일반 백성인 로빈 브레이크와 처음 만나게 된다.
베스: 안녕?
로빈: 안녕...근데, 당신은 뭔데?
베스: ...'베스'라고해!
로빈: 베스라고 하는구나. 숲에서 뭔일 있었어?
베스: 내가 타던 마차가 고장이 났어.
로빈: 마차가? 헤에! 부자구만~~!
베스: 당신의 마차를 빌려줄 수 있어?
로빈: 내 마차를? 날 부자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베스: 그럼, 넌 무엇을 하는 사람인데?
베스: 이 이상 마차를 타고 가디너를 뒤쫓는건 무리군요. 여왕 폐하에게 성경을 돌려달라는 편지만이라도 보내야겠습니다.
메리 튜더 여왕 : 베스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가디너 주교 : 호오~~! 여왕 폐하께 편지를 보냈단 말입니까?
메리 튜더 여왕 : 그렇습니다. 예하에 대해선 무례한 자라며 있을 수 없는 취급을 했다고 써져있군요. 당신이 언제나 명을 어겼으니 엄벌에 쳐했으면 한다고 말입니다.
私心読言?(내 마음을 엿보려 한단 말인가?)
違 (당신[126] 과는 달라.)
読 (엿보려 하지않아.)
濡衣着 (누명을 뒤집어 씌운다해도)
微笑返 (미소를 지을테고)
潰 (움추리지 않겠어.)
何 (무엇을 한다해도)
責罰 (책망받고 형벌을 받는다해도)
魂自由 (내 영혼만은 자유이니.)
心 (내 마음은 내 것이야.)
窓 (창문 따위는 없고)
覗 (들여다 보지 않아.)
秘思知得!(당신은 숨겨둔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命令 (명령을 받는)
(그때마다)
信念護!(내 신념만은 지켜왔어!)
同考方無理!(당신같은 사고방식은 무리야!)
自分自身裏切 (내 자신을 배신하지 않아.)
閉込 (날 가두려하고)
脅 (위협받는다 해도)
魂自由 (내 영혼만은 자유.)
心 (내 마음은 나의 것)
窓 (창문 따위는 없고)
覗 (들여다보지 않아)
秘思知得!(당신은 숨겨둔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望人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
信念 (합창 : 신념으로)
私人生 (나의 인생인걸.)
勇気戦挑! (합창: 용기있게 싸워 헤쳐가리!)
私支配者!(내가 지배자이니까!)
心 (내 마음은 내 것이야)
立上(합창: 일어서리라)
涙拭(합창: 눈물을 닦고)
窓覗!(창문 따위는 없고 들여다 보지 않겠어!)
曇 (합창: 흔들리지 않으리)
誇胸秘 (합창: 긍지를 마음 안에 간직한)
秘思 (숨겨놓은 내 마음을)
運命立向!(합창: 운명에 맞서나가리!)
知得!(당신은 알 수 없어!)
知得!(당신은 알 수 없어!)
神御加護 (합: 신의 가호를 빕니다.)
勇気レディ・ベス! (합: 용기있는 레이디 베스!)
~1막 마지막 베스의 넘버곡 "내 안에 간직하는 마음(秘想, The feelings I hide)"~
히라노 아야 역시 그 전엔 스즈미야 하루히같은 캐릭터만 연기하는 성우로만 인식되어왔고,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토호 인기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에포닌역을 맡았던 시절엔 "성우출신이 감히 뮤지컬계에 왔냐!!??"라는 식으로 성우시절때처럼 억지로 까임을 당했지만 레이디 베스 2014 초연을 통해 성우에서 뮤지컬 배우로서 전환하는데 성공한 계기가 레이디 베스 타이틀롤이다. 물론 2014 레이디 베스 초연땐 히라노 아야가 단순히 특정 극단출신[130] 이 아닌 성우출신이란 이유와 다카라젠느들의 전문역인 왕족역을 맡았단 이유로 "소시민이 왕족을 맡는다니 상상할 수 없다!", "다카라즈카 출신자가 아닌 소시민 전문가가 왕족역을 맡는다는건 (일본) 연극의 퀄리티 저하를 불러일으킨다!"란 식으로 억지주장에 가까운 까임을 받기도[131] 했지만, 실베스터 르베이는 오디션때 히라노 아야가 모차르트!의 콘스단체의 넘버인 "나는 예술가의 아내(독일어: Irgendwo wird immer getanzt, 일본어: ダンス止)"를 부를때부터 높이 평가했으며[132] , 실베스터 르베이가 본격적으로 일본 비(非)다카라즈카 뮤지컬 여배우에게도 관심갖는 계기가 되기도했다. 거기다 일본내 비(非)다카라즈카 해외 뮤지컬 팬들과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를 알고있는 이들과 서양의 일본 뮤지컬 팬들은 청순가련하고 사랑스러운 프린세스 타입의 하나후사 마리 베스보다 당차고 결단력이 강하며 현실적인 여장부 타입의 히라노 아야 베스에 더 호평을 주는 경우가 많다. 또하나의 의미는 히라노 아야가 일본 무대계 최초로 서양 왕족(王族)캐릭터를 연기한 비(非)다카라즈카 여배우이기에 그 동안 서양 왕족역할은 다카라즈카 출신자만이 가능하다는 일본 무대계의 인식을 깨는 기점이 되었으며, 히라노 아야를 기점으로 성우출신이 뮤지컬 배우가 되거나[133] 뮤지컬 배우가 성우 활동에도 참여[134] 하게 되는 다방면적인 길을 열기도 했다. 또, 실베스터 르베이는 레이디 베스 이후 토호판 모차르트! 2014년과 2018년 공연때 히라노 아야가 두번이나 콘스탄체역을 맡도록 지시했고, 2018년 토호 레베카 공연에서 이히(나, Ich)역에 배정하기도 했다.[135]
일본 전문지 뮤지컬(ミュージカル)에서는 레이디 베스를 2014년 뮤지컬 베스트텐 작품부문 1위에 선정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레이디 베스는 트라이스톤 소속 비(非)다카라즈카 뮤지컬 여배우 키노시타 하루카에게 있어 고등학생때 뮤지컬 배우로 확실히 진로를 결정짓게 된 계기를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키노시타 하루카는 로미오와 줄리엣 2017년 공연때인 데뷔 초에 인터뷰에서 2014년 후쿠오카 하카타좌에서 공연한 레이디 베스라고 봤다고 하며 베토벤 연습기간 당시 처음 같이 공연하게 되는 하나후사 마리와 만나서 하카타좌에서 상연한 레이디 베스를 4번이나 관람했다고 밝혔다.#[136] 또한 키노시타 하루카는 동작곡가의 최신작인 베토벤의 일본 초연을 총막공까지 모두 마친 후 2014년 하카타좌에서 레이디 베스를 관람했던 인증사진을 보여줌과 동시에 본작의 악역인 스티븐 가디너 주교를 연기하고있던 이시카와 젠이 레이디 베스를 중심으로 진행한 뮤지컬 강좌에 갔던것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언급한 바가 있다.##